2025/09/15

이병철 - -튀르키예에서

이병철 - -튀르키예에서  202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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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의 첫날과 둘쨋날,
이스탄불/

튀르키예에 왔다. 우리에게 터키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튀르키예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위치한 나라로, 역사·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교차로 역할을 해왔고, 특히 오스만 제국의 중심지이자 고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로서, 다양한 문화와 종교, 정치가 만났던 곳임에도 그 의미와 중요성이 간과된 나라이기도 하다.
뒤늦게사 이곳에 대한 관심이 생겨, 여행사 패키지편으로 아내 정원님과 함께 9박 10일의 일정으로 가볍게 나선 길이다.
서울 막내집에서 아침 5시경의 공항버스편으로 출발하여 이스탄불에 도착하니 오후 5시가 넘었다. 비행 시간만 12시간 반 정도 걸렸다. 시차가 6시간이니 한국은 밤 11시가 된 것이다. 다시 저녁을 먹고 숙소에 도착하니 잠자는 일만 남았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이 땅의 역사와 중요성을 다시 배운다.
튀르키예 지역은 히타이트, 그리스, 로마, 비잔틴 등 수많은 고대 문명이 흥망성쇠를 거듭한 땅이라고 한다.
에게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전략적 위치로 인해, 동서 교역의 중심지이자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이었고,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3개의 대륙을 지배했던 거대한 제국인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 제국 제국의 중심 도시 이스탄불은 4세기에는 로마 제국의 동방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세워지면서,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로 성장했고, 15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며 이곳은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그런 역사의 도시 이스탄불은 튀르키예의 가장 큰 도시이자, 역사적으로 세계 문명의 중심이었던 세계의 교차로로써,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중심으로 양쪽에 걸쳐 있어, 유일하게 두 대륙에 걸친 도시이기도 하다.
이스탄불이란 도시, 또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미로, 이 도시는 과거 비잔티움에서 콘스탄티노플로, 그리고 오스만제국시대부터는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동서양 문명의 융합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장소인인데, 아쉽게도 첫날은 그냥 잠만자게 되었다.
튀르키예가 세계의 역사, 문화의 중심이었던 곳이고 그 오랜 제국의 풍요로운 문화 유산과 크고 넓은 국토를 패키지 편의 짧은 여정으로선 주마간산격으로 그저 스쳐지나는 것으로만 만족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 또한 하나의 새로운 기억이 되리라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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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의 셋쨋날 그리고,
앙카라와 카파토키아/
둘쨋날의 시작을 이스탄불을 두 개의 반도로 나누는 해협인 골든 혼(Golden Horn)을 바라보는 묘지 언덕에서 해협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신,구도시를 바라본다. 구도시는 기원 전에 이어져 있고 신도시의 역사 또한 600년에 이른다.
그리고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까지 갔던 카라반, 그 대상들이 먼 어정에서 돌아와 첫 시장을 열었던 그랸드 바자르를 둘러보는 것으로 이곳에서의 첫 여정을 시작한다. 
3%의 유럽 땅을 차지하여 유럽의 일원으로 분류되는 나라, 이슬람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유럽경제공동체에 참여하여 유럽 식탁의 야채류를 60% 이상 공급하는 물산이 풍요로운 나라. 한때 유럽을 지배했고,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 유적지와 실크로드의 흔적과 성서 속 사도들의 발자취와 초대 교회의 이야기가 아직도 숨쉬고 있는 나라, 그리고 내가 닮았으면 하는 유일한 시인이자 수피즘의 성자인 루미성인이 살았고 죽어 묻혔던 땅.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을 자신들의 형제국이라고 부르며 특별히 우호적으로 대하는 이 나라에 대해 단순히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가이드의 해박한 설명을 들을수록 더욱 그렇게 생각된다. 
이 나라, 이 지역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한다.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면 별도의 공부가 더 필요하리라 싶다. 
이번 패키지 여행의 동선이 3200km에 가깝다고 하는데, 실제 이곳에서 여행기간은 7일에 불과하니 하루 이동거리만 평균 500km에 이른다. 그러니 대부분 주마간산격으로 스쳐지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아침 4시에 일어나 5시에 식사하고 6시에 출발하기도 하는데, 6시간의 시차까지 있으니 숙소로 돌아오면 지쳐서 그날 보고 들었던 것을 정리하여 나눌 여유조차 없다. 
차량으로 이동 중에도 가이드의 해박한 설명을 놓치기 아까워 제대로 졸지도 못하니 더욱 그렇다.
들었던 이야기와 본 것들 가운데 함깨 나누었으면 하는 것들이 많다. 고대 신들의 시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풍부하지만 이번 여정 기간 중에선 나누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방문하는 한 곳 한 곳이 모두 이야기를 길게 따로 나누어야할 곳들인데, 나로썬 지금은 그 이야기들 따라가기에도 벅찬 까닭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돌아가서 기회가 닿는대로 나누기로 하고 우선 이곳의 풍경을 담은 사진이나마 대강 나누기로 한다. 
이곳 여름은 건기라고 하는데, 우리가 도착한 다음날부터 비가 오락가락한다. 이 또한 반가운 일이다. 날씨는 한국과 비슷하지만 다행히 저녁엔 서늘하다. 뒤늦게 소식 전하는 지금 갈수록 이 나라가 내겐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박정미
튀르키에 수도가 이스탄불이 아니고 앙카라인 걸 선생님 덕분에 처음 알았네요. 건강 주의하시고 즐거운 여행 되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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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의 셋쨋날 그리고,
앙카라와 카파토키아/
둘쨋날의 시작을 이스탄불을 두 개의 반도로 나누는 해협인 골든 혼(Golden Horn)을 바라보는 묘지 언덕에서 해협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신,구도시를 바라본다. 구도시는 기원 전에 이어져 있고 신도시의 역사 또한 600년에 이른다.
그리고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까지 갔던 카라반, 그 대상들이 먼 어정에서 돌아와 첫 시장을 열었던 그랸드 바자르를 둘러보는 것으로 이곳에서의 첫 여정을 시작한다.
3%의 유럽 땅을 차지하여 유럽의 일원으로 분류되는 나라, 이슬람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유럽경제공동체에 참여하여 유럽 식탁의 야채류를 60% 이상 공급하는 물산이 풍요로운 나라. 한때 유럽을 지배했고,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 유적지와 실크로드의 흔적과 성서 속 사도들의 발자취와 초대 교회의 이야기가 아직도 숨쉬고 있는 나라, 그리고 내가 닮았으면 하는 유일한 시인이자 수피즘의 성자인 루미성인이 살았고 죽어 묻혔던 땅.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을 자신들의 형제국이라고 부르며 특별히 우호적으로 대하는 이 나라에 대해 단순히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가이드의 해박한 설명을 들을수록 더욱 그렇게 생각된다.
이 나라, 이 지역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한다.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면 별도의 공부가 더 필요하리라 싶다.
이번 패키지 여행의 동선이 3200km에 가깝다고 하는데, 실제 이곳에서 여행기간은 7일에 불과하니 하루 이동거리만 평균 500km에 이른다. 그러니 대부분 주마간산격으로 스쳐지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아침 4시에 일어나 5시에 식사하고 6시에 출발하기도 하는데, 6시간의 시차까지 있으니 숙소로 돌아오면 지쳐서 그날 보고 들었던 것을 정리하여 나눌 여유조차 없다.
차량으로 이동 중에도 가이드의 해박한 설명을 놓치기 아까워 제대로 졸지도 못하니 더욱 그렇다.
들었던 이야기와 본 것들 가운데 함깨 나누었으면 하는 것들이 많다. 고대 신들의 시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풍부하지만 이번 여정 기간 중에선 나누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방문하는 한 곳 한 곳이 모두 이야기를 길게 따로 나누어야할 곳들인데, 나로썬 지금은 그 이야기들 따라가기에도 벅찬 까닭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돌아가서 기회가 닿는대로 나누기로 하고 우선 이곳의 풍경을 담은 사진이나마 대강 나누기로 한다.
이곳 여름은 건기라고 하는데, 우리가 도착한 다음날부터 비가 오락가락한다. 이 또한 반가운 일이다. 날씨는 한국과 비슷하지만 다행히 저녁엔 서늘하다. 뒤늦게 소식 전하는 지금 갈수록 이 나라가 내겐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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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의 셋째 날 이후,
세 가지 나눌 이야기/
그동안 어디를 가든지, 방문한 곳에 대한 느낌이나 소감 같은 것을 짧게라도 가능한 그날이나 늦어도 다음 날에 적어 나누고자 했다.
그래야 비교적 그때의 생생한 느낌을 날것 그대로 전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내 나름의 일지와 비슷한 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방문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보다는 느낌과 소감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 수준이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비록 그런 수준이긴 하지만 그렇게라도 충실히 그날의 소식을 나누고자 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일지 형태로 소식 나누기를 포기해야 했다.
대부분의 일정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이어지고, 이동 동선이 3,000km를 훌쩍 넘어 풍경을 따라가기도 어려웠는데, 결정적으로는 유적지가 너무 많아,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었다.
문명과 제국의 흥망성쇠가 수차례 교차한 곳이라 사전 지식이 없이는 짧은 시간에 스쳐 지나가는 이 흐름을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이 지역에 대한 공부를 하고 갔더라면 정말 흥미롭고 유익한 여정이 되었으리라 싶었다.
앞으로 이 지역을 방문하려는 이가 있다면 최소한 한두 권의 책은 읽고 가실 것을 권하고 싶다.
그렇게 한다면 아마도 이번 튀르키예 코스가 세계 어느 곳보다도 더 멋지고 유익한 여행지가 되리라 생각한다.
이번 여정을 통해 나는 특히 세 가지를 앞으로 좀 더 깊게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첫번째는 튀르키예 사람들이 왜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 부르며 우리나라 사람들을 우호적으로 대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문명과 제국의 흥망성쇠에 대한 성찰이다. 문명과 제국의 흥망성쇠가 교차한 이곳이 내게 던진 화두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수피즘의 성자이자 시인이었던 루미에 대한 이야기다. 내 개인적 관심사이기도 하다.
이 세 가지 이야기를 틈나는 대로 나눌 수 있으면 싶다.
이 생각들이 이번 튀르키예의 짧은 여정에서 내가 건져 올린 가장 소중한 생각거리라 할 수 있다.
이번 패키지 여행에 동행한 사람들은 일곱 쌍의 부부와 친구와 함께 온 두 여성분, 이렇게 모두 18명이었다.
모두 처음 만나는 인연이었다.
이 일행 중 부부가 함께 참여한 이들 가운데 네 명의 남성이 칠십대였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연장자였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이가 있었는데, 동방예의지국의 법도에 따라 서열이 정해졌고, 덕분에 멋진 아우를 얻게 되었다.
평소 별명이 ‘느린 곰’이라고 해서 그에게 '서웅(徐熊)’이라는 호를 붙여 주었는데,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서웅 선생은 삼성 연구소에서 기술 대상을 받은 우리나라 IT 1세대의 인물이다.
칠순을 기념하여 혼자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를 다녀왔다고 하기에, 그 순간 마음에 들어 동생으로 삼았다.
나 역시 칠순을 기념하여 번지점프가 처음 시작되었다는 뉴질랜드 퀸스타운의 카와라우 다리에서 뛰어내렸던 적이 있어 서로 통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칠십을 맞이하여 위로 설산을 향해 올랐고,
다른 한 사람은 아래로 강을 향해 몸을 던졌다.
이런 인연 또한 이번 여정의 큰 선물이었다.
함께한 일행들은 모두 배려심 깊은 멋진 분들이었다.
늘 밝은 빛으로 인사를 나누고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이 마치 오래 사귄 사람들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번 여정을 더욱 알차고 의미 있게 한 것은 가이드 김상영 선생의 해박한 지식과 놀라운 해설, 자상한 안내와 배려였다.
나는 패키지여행을 거의 해본 적이 없지만, 지금까지 만난 가이드 중에서 가장 뛰어난 안내자이자 해설사였다.
오래전 막내 친구의 초청으로 부탄을 방문한 적이 있다.
부탄은 국가 정책으로 해외 관광 입국자의 수를 제한하고, 외국인의 자유여행을 금지한다.
이 나라에서 관광 안내자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가 실시하는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한다. 마치 우리의 변호사, 회계사와 같은 수준의 전문 자격증인 셈이다.
그만큼 가이드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이다.
아마도 그런 자격증 취득 과정이 우리나라에도 있다면, 김 선생은 충분히 합격하리라 확신한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지중해에서 해발 2,000m가 넘는 험준한 토로스 산맥 고개를 넘었던 그 길을 우리는 거꾸로 달려가 지중해를 만났다.
그리고 그리스 신들이 살았던 올림포스산(2,563m)에 올랐고,
알렉산더 대왕이 고르디에스의 매듭을 끊었던 곳, 사도 요한의 초대 교회가 세워졌던 에페소,.오스만제국의 성쇠의 흔적,.술탄의 여인들이 머물던 하렘을 방문하고
배를 타고 선상에서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보스포루스해협에서 두 대륙을 바라보았고,.밤의 이스탄불을 거닐며 튀르키예식의 달콤한 다식을 곁들인 한 잔의 짜이(홍차)로 마지막 밤을 즐겼다.
벅차고 충만한 여정, 알찬 시간이었다.
이번 여정에 함께한 일행들과 김상영 선생께. 그리고 장거리를 전 일정를 운전해주신 기사 에델(?)님께도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린다.
(추신/
이번 여행에서 아내 정원님과 함께 부부 동반 사진을 내 생애에서 가장 많이 찍었다.
이 또한 김상영 선생과 일행들이 베풀어 준 멋진 선물이었다.
장거리 해외여행은 가능한 한 살이라도 더 젊었을 때 다녀오시길 권한다.
그래야 더 멋지고 신명나는 여정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리라 믿는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미루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지 않은가.)
(25. 09. 13)

박정미
동생 생기신 거 축하드립니다! 저도 튀르키예 가고 싶은데 돈 생기면 선생님께 여행사 의논 드려야겠네요. 패키지여행을 이렇게 만족스럽게 다녀오신다는 것도 큰 복입니다.
1d
Reply

Author
이병철
박정미 튀르키예는 2차례나 3개의 대륙을 지배했던 유일한 지역이었네. 넓은 땅과 풍부한 물산과 기독교와 이슬람이 교차하면서 빚어낸 역사와 문화의 흔적이 곳곳에 즐비했네. 아마도 내 생각엔 언제가 이 나라가 세계의 강국 가운데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었네. 이 나라를 잘 느끼려면 사전 지식과 넉넉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네. 꼭 한번 다녀오게. 장서방과 함깨하면 생애의 멋진 여정이 될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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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에서,
형제의 나라 꼬레(Kore)/
이스탄불의 석양이 저문 어스름에 골든혼 다리를 지나는데 중년의 튀르키예 사람이 다가와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한다. 휴게소에서 멋진 청년이 영어를 할 줄 아느냐며 반갑게 다가온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을 때, 코리아라고 하면 “오, 코레!” 하며 반갑게 맞이한다. 거리의 상가나 휴게소에서는 웬만한 한국말은 거의 다 통한다. 튀르키예 사람들이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실감 난다.
튀르키예의 수도인 앙카라에는 한국 공원이 있고, 그 공원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산화한 72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과 경기도 화성의 터키군 참전기념비에 그들의 희생이 기려지고 있고, 서울에는 튀르키예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왜 튀르키예 사람들은 우리를 형제의 나라로 부르고, 한국전쟁 때 그 많은 젊은이들을 파견하여 피를 흘리게 되었을까. 이 물음은 튀르키예를 여행하기 전부터 내가 품고 있던 질문 중 하나였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이름조차 모르던 먼 극동의 낯선 나라에, 18살에서 22살 정도의 꽃다운 젊은이들이 피 흘리며 죽어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산화한 462위의 영혼이 지금도 부산 UN기념공원에 잠들어 있다.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참전용사의 유해들이 귀국하지 않고 있는 것은, 전사자는 피를 흘린 그 땅에 묻혀야 한다는 이슬람 율법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1950년 6월, 한반도에서 전쟁의 불길이 치솟자 튀르키예는 가장 먼저 UN군으로 달려왔다. 정전까지 14,936명, 교대 병력까지 합치면 21,000여 명의 젊은이들이 한국 땅을 지켰다. 그중 721명이 전사했고, 2,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이 통계는 출처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튀르키예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피로 맺어진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는 것이다.
튀르키예가 그 많은 파병과 희생을 치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당시 소련의 위협 속에서 서방의 신뢰를 얻고 NATO에 가입하려는 전략적 선택이었지만, 그 젊은 병사들이 보여준 용기와 피의 대가는 단순한 정치 계산을 넘어 형제의 나라라는 이름을 남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참전용사들은 한동안 영웅이 아닌 ‘코레알리(Koreali)’, 즉 ‘한국에 다녀온 자’라는 멸칭으로 불리며 냉대를 받았다고 한다. 가이드인 김 선생의 설명을 듣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국민들은 왜 먼 나라 전쟁에 청년들이 희생되어야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국가의 보상도 미약했다. 그들은 가난과 트라우마 속에 잊혀져 갔고, ‘코레알리’라는 말은 비하와 멸시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 인식이 바뀌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1999년 대지진 때 한국은 구호대와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기업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튀르키예를 도왔다. 특히 현대자동차는 복구에 필요한 중장비를 가져와 현장에서 복구 활동에 앞장섰고, 그 이후에도 튀르키예를 위한 사회적 기여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왔다. 이런 노력들은 튀르키예 사람들에게 한국이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진정한 형제라는 깊은 감사의 마음을 품게 했다고 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3·4위전에서 두 나라 선수들이 손을 맞잡고 경기장을 함께 돌던 장면은 전 세계인의 마음을 울리며 두 나라의 인연을 다시금 일깨웠다. 이후 한국 정부와 튀르키예 정부가 참전용사에게 훈장과 감사 메달을 수여하고 복지 지원을 확대하면서, 그들을 국가의 자랑스러운 영웅으로 다시 세웠다. 이제 ‘코레알리’라는 비하의 말은 사라지고, 그들은 형제의 나라를 위해 피 흘린 영웅으로 불리게 되었다.
튀르키예의 역사 교과서에는 한국이 고구려 시대부터 같은 뿌리의 형제국이라고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나는 이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두 나라가 먼 거리에 있지만 뿌리가 닮아 있다는 주장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역사·문화적, 인류학적 연관성을 보면 튀르키예 민족의 뿌리는 알타이 산맥 주변의 유목민족, 즉 돌궐·흉노 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한민족 역시 언어학적·문화적 계보에서 이들과 유사한 알타이어족 계통으로 보는 학설이 있다. 말과 양, 유목 문화, 장식 문양 등에서 공통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두 나라 사람들은 서로의 전통문화에서 낯설지 않은 유사성을 느끼곤 한다. 처음 만났을 때도 어쩐지 낯설지 않았던 이유는 우리 마음속에 이미 ‘형제의 기억’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튀르키예가 한국전쟁 때 그 많은 병력을 파병한 이유는 우리나라가 월남전에 파병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닮은 점도 없지 않다.
나 역시 월남전 때 파병을 신청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선친께서 왜 남의 나라에 가서 헛되이 피를 흘리려고 하느냐는 그 말씀에 그만 두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 적이 있었기에 튀르키예의 꽃다운 젊은이들이 이 땅에서 피 흘리며 산화한 것을 떠올리면 더욱 가슴이 저려온다.
가이드 김 선생이 한국전쟁 때 참전했던 튀르키예 노인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노병은 김 선생의 손을 꼭 잡고 “한국이 잘 살아줘서 고맙다”라는 말을 남기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그 한 마디의 말은 자신들이 흘린 피가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한 감사이자, 참전용사로서의 자부심 회복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 역시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지금 우리가 자유와 경제적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피의 희생 덕분이다. 옛말에 “원수는 빨리 잊고, 은혜는 기억하여 반드시 보답하라”는 말이 있다. 이제는 우리가 그 고마움에 보답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렇게 피로써 지켜낸 이 땅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번 튀르키예 여행은 나에게 그 사실을 새삼 일깨워 준 또 하나의 큰 선물이었다.
그렇게 튀르키예는 우리에게도 피로 맺은 형제의 나라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2025.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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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병철 - -튀르키예에서 5, 루미의 숨결을 스쳐가며/ ‘사랑의 춤’ 사랑은 우리를 산산이 부수고, 그 파편으로... | Facebook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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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에서 5,
루미의 숨결을 스쳐가며/

‘사랑의 춤’
사랑은 우리를 산산이 부수고,
그 파편으로 또다시 하나를 만든다.
춤추라.
이 세상이 무너져도 춤추라.
네가 찾는 신은
네 가슴 속에서 춤추고 있다.
― 루미
내가 루미 시인을 만난 것은 관옥 사형이 번역한 루미 시집(루미詩抄/내가 당신이라고 말하라)을 접하면서였다.
그 시집을 읽고 루미 시인을 통해 이슬람의 신비주의인 수피즘(Sufism)에 대해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나도 수피즘의 현자라고 불리는 루미 시인처럼 그런 시를 쓰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루미 시인은 내가 시를 쓰는 데 있어 유일한 시적(詩的)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시는 아직도 스승 루미의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하지만, 내 시에서 ‘당신’이라는 말이 거의 빠지지 않는 것은
스승을 닮아가고자 하는 내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 첫 시집의 제목도 "당신이 있어" 였다.
그가 노래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신과의 합일에 대한 갈망은 내가 시를 쓰며 평생 붙잡고 싶었던 화두와 같았다.
이번 튀르키예의 여정에서 나는 루미가 스승 샴스(Shams)를 만나 내면의 영적 폭발로 새로운 길을 열어갔던 수피즘의 도시 코냐(Konya)를 잠시 스쳐 지나며 다시 루미와 그의 스승 샴스를 떠올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내에 들어가 루미의 묘소와 기념관은 찾아가지 못했다.
인구 200만에 달하는 이 도시 코냐에는 술집이 하나도 없고, 여성들은 아직도 검은 히잡을 쓰고 다니며 원리주의의 모습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인이자 현자였던 루미는 영혼의 자유와 해방을 시와 노래와 춤으로 드러내며 걸림 없는 존재였다.
언젠가 나도 그처럼 삶과 시가 하나가 되는 시를 쓰고, 노래하고 춤추고 싶었다.
루미, 그 이름은 지금도 튀르키예와 전 세계에서 ‘영혼의 시인’, ‘수피즘의 현자’로 불리며 종교와 문화를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오늘날까지도 가장 많이 읽히는 시 중 하나로 사랑받고 있다.
잘랄루딘 루미(1207~1273), 그가 살던 시대는 몽골의 침략으로 온 세상이 불안과 혼란에 휩싸였던 시기였다.
그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 가족과 함께 페르시아와 시리아, 그리고 지금의튀르키예의 코냐로 이어지는 길을 떠돌다 결국 그곳에 정착했다.
루미는 신학자이자 학자로 명성을 쌓았지만, 곧 신과의 직접적인 합일을 추구하는 길, 수피즘에 깊이 들어섰다.
수피즘은 이슬람의 내면을 탐구하는 신비주의 영성 운동으로, 춤과 음악, 시를 통해 신과 하나 되는 체험을 강조한다.
우리가 잘 아는 ‘세마춤(Whirling Dervish)’, 그 신비로운 회전 춤은 바로 루미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
루미의 시에는 종교적 경계가 없다.
그의 언어는 무슬림, 기독교인, 힌두교인, 그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은유와 상징이 풍부하며, 춤과 음악의 리듬을 닮아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든다.
그의 시 속에서 사랑은 단순한 인간의 사랑을 넘어 우주와 신을 향한 절대적 사랑이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다 보면,우리 자신이 이미 그 신비로운 춤의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루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샴스 타브리즈(Shams-i-Tabriz)라는 신비가다.
루미는 본래 신학자이자 율법학자로서 학문과 설교에 몰두했으나, 샴스를 만난 뒤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샴스는 루미에게 영적 사랑의 불을 지핀 사람이었다.
그와의 만남으로 루미의 내면에서 폭발적인 변화가 일어났고,.그 이후 루미의 시와 춤, 수피즘 사상은 꽃피웠다.
샴스가 갑작스레 사라진 뒤, 루미는 그 슬픔을 수많은 시와 춤으로 승화시켰다.
루미의 시 속에서 ‘사랑하는 이’로 등장하는 대상은 사실상 샴스를 가리킨다고도 한다.
루미에게 샴스와의 사랑은 존재와 영혼을 오롯이 불태운 헌신과도 같은 불꽃이었으리라 느껴진다.
예전에 나는 신성의 춤(神性舞)이라고 불리는 구르지예프 무브먼트를 잠시 연습할 때 세마춤, 그 수피댄스를 살짝 맛본 적이 있다.
루미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이 춤은 치마 끝단에 모래를 넣어 회전할 때 치마 폭이 자연스럽게 펼쳐지게 하고,
그 치마를 입은 채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끊임없이 도는 몸짓으로 이루어진다.
춤추는 이는 두 팔을 펼쳐 오른손은 하늘을 향해 신의 축복을 받아들이고, 왼손은 아래를 향해 그 축복을 세상에 흘려보낸다.
몸은 쉼 없이 회전하지만 중심은 결코 흐트러지지 않는다..춤추는 이는 그 회전 속에서 자신과 세상, 그리고 신의 경계를 잊는다.
“나는 돌고, 세상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오직 하나.”
45분 동안 끊임없이 회전하는 이 세마춤을 처음 추었을 때 나는 어지럽고 숨이 가빴다..하지만 이 춤을 계속 추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감각이 사라지고,.오직 내면의 침묵과 황홀만이 남는다고 한다..루미가 말한 영혼의 춤의 의미가 바로 그것일 것이다.
코냐, 잠시 스쳐간 도시였지만.그곳은 내 시의 영적 스승인 루미가 남긴 사랑과 신비의 세계를.다시 생각하게 해준 소중한 곳이었다.
수피 음악을 구하고 싶어 가이드 김선생에게 CD를 부탁했더니 요즘은 CD로 된 음반을 구하기 어렵다며 대신 자신의 스마트폰에 담긴 곡들을 보내주었다.
실크로드의 대상들이 첫 시장을 열었던 그랜드 바자르에 들러 세마춤을 추는 수피 그림 액자 하나와 접시 네 개를 샀다. 접시의 그림은 인쇄가 아닌 직접 손으로 그린 것이라기에 기념 삼아 산 것이다. 앞으로 이 접시에 음식을 담아 먹을 때마다 루미와 그가 남긴, 돌고 도는 수피댄스가 함께 떠오를 것이다.
돌고, 또 도는 그 춤 속에서 나 자신과 온 세상이 하나가 되기를,
언젠가 다시 그곳을 찾게 된다면,
그때는 나도 그들과 함께 이 춤을 춰보고 싶다.
(2025.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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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에서 6,
문명과 제국의 교차로에서/

나의 오랜 관심 주제는 '문명의 전환’이었다.

자연과 우주의 법칙을 거스르는 반자연적인 현대 물질문명은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참여했던 ‘한살림선언’, ‘생태귀농운동’, '생태영성학교', 그리고 최근의 ‘문명전환을 위한 지리산 정치학교’ 등도 모두 이러한 관심의 연장선 위에 있다.
이른바 새천년이라는 2000년을 맞이하며, 내가 그해 1월 초에 "살아남기, 근원으로 돌아가기"라는 책을 출간했던 것은 스스로의 생존 기반을 파괴하는 자기살해적인 현대문명의 실상을 직시하고, 그 붕괴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을 내 나름으로 모색하고 그 메시지를 함께 나누고 싶였기 때문이었다.
이번 튀르키예 여행에서 내가 관심을 갖고 주목했던 것도 또한 문명전환과 관련된 주제였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세 대륙의 길목에 자리한 이 땅은 문명과 제국의 흥망이 끊임없이 교차해온, 세계에서 가장 특수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역사상 세 개의 대륙을 두 차례나 지배한 제국은 오직 이곳에서만 등장했다.
하나는 로마 제국, 또 하나는 오스만 제국이다.
동서양의 길목에 있었기에 그 흥망은 단지 한 나라의 운명을 넘어 세계사의 흐름 자체를 바꾸었다. 그래서 튀르키예는 언제나 문명의 용광로, 혹은 세계사의 실험실처럼 여겨져 왔다.
이 땅 위에서 그리스 신화의 신들,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이 차례로 주인이 되어왔다. 그 과정은 단순한 교체가 아니라, 얽히고 풀리며 서로에게 흔적을 남기는 복잡한 흐름이었다.
로마 제국 시절에는 그리스 다신교의 신전들이 세워졌다. 후기에는 기독교가 국교가 되며 거대한 성당들이 들어섰다. 그리고 15세기,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을 정복하면서 기독교의 성당은 이슬람의 모스크로 바뀌었다.
대리석으로 웅장하게 지어진 그리스 신전은 무너지고, 그 파편으로 다시 교회가 지어졌다. 그리고 제국이 교체되면, 그 웅장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교회마저 허물어 모스크로 바뀌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아야소피아 성당이다.
한 건물 안에 그리스의 조각, 기독교의 모자이크, 이슬람의 장식 문양이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은, 이 땅의 역사와 문명의 얽힘을 그대로 보여준다.
성당의 건물을 파괴하지 않고 슐탄의 모스크로 바꿀 때 십자가 표시나 성화들을 제거하거나 회반죽으로 묻어버렸다. 천정화로 그려진 성모가 아기 예수와 함께 있는 성모자상 그림은 지금도 하얀 천으로 가려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교차의 과정은 언제나 약탈과 살육, 끔찍한 파괴를 동반했다.
새로운 문명이 들어설 때마다 그 땅은 피와 눈물로 강처럼 젖었다.
웅장한 대리석 건축물 앞에서 경탄하다가도 그 자리가 곧 피와 눈물로 얼룩진 현장이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역사 속 제국의 흥망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제국이 흥할 때에는 반드시 몇 가지 공통점이 나타난다.
풍부한 자원, 안정된 정치, 새로운 기술, 그리고 타 문명과의 활발한 교류가 그것이다.
그러나 흥한 제국은 언젠가 반드시 쇠퇴하게 마련이다..이는 마치 자연의 법칙처럼 되풀이된다.
흥망의 가장 큰 동력은 권력과 종교의 결합,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인간의 욕망이었다.
로마 제국은 내부의 부패와 탐욕이 외부의 침략보다 더 큰 몰락의 원인이었다.
오스만 제국 또한 방대한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 불가능한 세금과 전쟁을 반복하다 결국 붕괴했다. 
한 국가의 흥망성쇠 또한 다르지 않다. 오래전 베네수엘라에 잠시 머물렀을 때, 한 나라가 포퓰리즘의 정치꾼들에 의해 어떻게 무너져내리는가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 베네수엘라와 지금의 이 나라 정치상황이 오버랩 되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애써 세운 것들도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몇 해 전, 나는 도반들과 함께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책 "문명의 붕괴"를 읽으며 문명의 흥망성쇠를 공부한 적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문명의 붕괴는 단지 외부의 침략 때문만이 아니라, 내부에서의 자원 고갈, 인구 과잉, 환경 파괴, 그리고 지도자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진다.
마야 문명, 그린란드의 바이킹, 이스터섬 등 찬란했던 문명들이 스스로를 파괴한 이야기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깊은 경고를 준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문명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지구라는 하나의 그릇 안에 담긴 단일 문명이기에 그 붕괴는 곧 인류 전체의 몰락을 뜻한다.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팽창한 성장과 탐욕은 지구의 자원과 생태계를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기후위기, 전쟁, 경제적 불평등, 끝없는 욕망의 확장은 이미 붕괴의 징조를 드러내고 있다.
만약 현존 문명이 스스로 붕괴하지 않으려면,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그 전환은 단순히 기술의 발전이나 정치 체제의 변화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 자체의 변화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생태적 각성과 공감력의 회복이 그 마탕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자연과 인간을 따로 보지 않고, 생명 전체를 하나로 보는 새로운 문명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나는 상생과 순환의 ‘살림의 문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태적 각성과 함께 인간의 생태적 정체성으로 ‘신령한 짐승’이라는 개념을 계속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땅과 자연을 떠나서는, 이 행성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하지 않는 한, 자발적인 운명의 전환은 불가능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만약 현재의 문명이 무너진다면, 그 이후에 도래할 문명은 아마도 더 단순하고, 더 생태적이며, 삶과 영성이 하나로 이어진 문명일 것이다.
마치 루미가 춤과 시로 노래했던 세계처럼, 기술과 영혼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흐르는 문명. 그것이 인류가 다음에 맞이해야 할 새로운 길일 것이다.
그러나 그 길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문명이 혹독한 겨울을 통과해야 할지도 모른다.
혹한의 겨울 없이는 눈부신 봄날의 초록 또한 있을 수 없듯이. 
내가 불안과 우려 속에서도 애써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2025.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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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에서 7,
두 발 동료를 먹다/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발 달린 동물을 먹이로 삼지 않은 지는 제법 오래되었다. 햇수로는 한 20년은 더 된 것 같다. 그런 내가 이번 튀르키예 여행에서 한 끼의 닭고기를 먹었다. 그동안 어쩔 수 없이 두어 차례 삼계탕을 먹게 되었던 경우를 제외하며 내가 자발적으로 먹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육식이 지구 행성의 식사법으로 걸맞지 않다는 사실을 접한 뒤부터 가능한 육식을 멀리해 왔는데, 나중에는 그것이 지구 생태계를 위한 식사법 때문이기보다는, 내 곁에 있는 서로의 눈을 마주하며 나처럼 느끼고 반응하는, 그 뜨거운 심장을 가진 동료 생명들을 보면서 차마 내 먹이로 삼을 수 없었기에 저절로 육식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엄격한 채식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생선이나 달걀, 유제품 같은 것들은 때때로 즐겨 먹기도 한다.
나는 무슨 ‘주의자’가 아니다. 어떤 주의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꿈에도 없다.
그래서 이른바 정치적 정체성을 진보냐 보수냐, 또는 좌우로 나눌 때도 어느 한편에 서고 싶은 생각이 없다.
사람들이 나를 소개할 때 흔히 생명운동가라고 할 때가 많다. 생명평화를 화두로 오랫동안 함께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그런 소개에 공감하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생명주의자라거나 평화주의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폭력과 전쟁에 반대하지만, 불의하고 부당한 세력의 압제와 맞서게 될 경우에는,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물리적 힘을 행사하여 그 세력을 물리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불의한 집단들의 부당한 행태를 보거나,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양아치 같은 무리들이 ‘민주’와 ‘정의’나 '나라'를 내세우며 내로남불식 작태를 벌이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마음속에 치솟는 분노를 느끼곤 한다. 그런 내 자신을 보며, 내 스스로도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어떤 이념을 추종하고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할 땐 어떤 이념이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나는 특정 이념에 종속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념보다 사람이 더 우선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다는 예수님의 지적이 크게 공감되는 것도 이런 까닭이라 싶다. 
나는 중도를 지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도주의자도 아니다.
그때그때 상황과 필요에 따라서 내가 옳다고 느끼는 것, 내 마음이 더 향하는 쪽을 지지하거나 함께한다.
어제까지 지지했더라도 오늘 내가 지지했던 쪽이 잘못했다고 판단된다면, 그 순간 나는 반대한다. 아마도 이런 내 성향이 내가 믿음의 존재로 살기가 어려운 까닭이라 싶기도 하다.  
누군가 내 이런 처신을 기회주의적이라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다”라고 말하겠다. 그것이 살아 있는 자의 자세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나라의 좌우 양 진영으로 갈라져 심리적 내전 상태와 다를 바 없는 극단적인 대립에 대해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보기에는 두 집단 모두 거짓된 허위의식, 그 망령된 의식에 깊게 빙의된 집단처럼 보여진다. 
“내 주장이 틀림없다”, “우리 편이 무조건 옳다”라는 그 확증편향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빙의 현상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번 튀르키예 여행에서 나는 발 달린 동료 생명을 먹지 않는다는 오랜 내 관행을 깨고, 두 발이 달린 동물인 닭 요리를 먹었다.
지난 7월, 육식이 중심인 몽골 생태영성순례 때까지도 나는 채식 중심의 식사를 나름으로 고수했었다.
그런 내가 이번에 채식이 풍부한 튀르키예 여행에서 갑작스레(?) 두 발 달린 동물을 먹게 된 까닭은, 매끼 고기 요리(튀르키예에서는 ‘케밥’이라는 요리)가 날마다 제공될 때마다 “나는 채식을 한다”고 이야기하기가 왠지 더욱 부담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까닭은, 아마도 최근 들어 주변에서 “이제 나이도 있으니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해야 한다”는 끈질긴 권유와 유혹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아예 오랜 관행을 깨뜨리기로 마음먹은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꺼내는 것은, 앞으로 내가 두 발 달린 것을 먹더라도 주변에서 의아하게 생각하지 말아 달라는 속내도 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위해 출가하신 뒤부터 마지막 열반에 드시기까지, 길 위를 떠돌며 탁발하시는 삶을 사셨다. ‘탁발’이란 걸식을 조금 더 고상하게 부르는 말이다.
그 탁발의 원칙으로 부처님께서 내세운 것은, 음식을 주는 대로 얻어먹되, 가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얻어먹을 집을 가려서도 안 되고, 먹고 싶은 음식이라고 더 달라 하거나, 먹기 싫은 음식이라고 거부해서도 안 된다. 그냥 주는 대로 고맙게 받아, 오직 깨달음을 증진하기 위한 몸과 마음의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처님의 마지막 공양 또한 그 음식이 몸을 상하게 하는 해로운 것임을 알면서도, 동행한 이들에게는 먹지 말라고 이르시고는 당신만 홀로 드셨다고 한다.
그로 인한 식중독으로 병을 얻어 결국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부처님께서 혼자 드신 것은 그것이 공양한 이에 대한 예의라고 여겼기 때문이라 싶다.
이번에 내가 두 발 달린 음식을 먹은 것은 내게는 하나의 중요한 사건일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음식에 대한 오랜 관행을 깨뜨렸다는 의미를 넘어, 앞으로 남은 날들은 내가 여태껏 지켜왔던 ‘옳다’, ‘그래야 한다’는 생각들로부터 좀 더 자유롭고 여유롭게 살고 싶다는 하나의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내가 공자의 절사(絶四)라는 '무의(無意), 무고(無固), 무필(無必), 무아(無我)'을 들먹이는 것은 과분한 이야기지만, 나도 가능한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만은 간절하다.
'육식의 흔적'
새들은 아직 나를 믿지 못한다
곁을 지날 때마다
새들은 놀라 날아간다
아직도 내게 육식의 흔적이 남아 있는가
나는 너희를 잡지 않고
나는 너희를 먹지 않는다 해도 
새들이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은
내 속에 남아 있는
오랜 야만의 습성 때문인가
언제쯤이면 나도 유전자 속 뿌리 깊은
사냥꾼의 지문을 씻고
한 송이 들꽃처럼 맑은 몸이 되어
저 새들과 동무할 수 있을까
가볍게 날며
하늘을 함께 사랑할 수 있을까.
(시집 "신령한 짐승을 위하여" 중에서)
이제는 이렇게 노래할 수도 없게 되었다.
아침마다 거실 앞에서 지저귀는 새들이나, 뒷산을 오르다 마주치는 새들과도 눈길을 마주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미안하다.
내가 육식을 삼가면서부터 낚시를 하지 않았던 것처럼, 앞으로 내 손으로는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겠다고 다시 마음 모은다. 
부디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두 나래로 하늘을 날고, 네 발로 땅을 치닫는 내 동료 생명들에게 미안함으로 이 소식을 나눈다. 
모두 탈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25.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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