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한 공부를 마친다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죽음에 관한 공부는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25년, 올 한 해 숲마루재 모임의 공부 주제를 ‘죽음’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어제 모임을 끝으로 올해의 주제인 '죽음'에 관한 공부를 일단 마무리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매달 한 번씩 모여
어제 모임을 끝으로 올해의 주제인 '죽음'에 관한 공부를 일단 마무리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매달 한 번씩 모여
죽음에 관한 경전이라 일컫는 "사자(死者)의 서(書)"를 중심으로,
임사체험 등의 책들과 죽음에 관한 다큐멘터리와 영화, 시 등 이런저런 자료들을 참고하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다.
그리고 어제 마지막 모임에서는 저마다 써 온 유서를 다시 읽고 들었다.
지난달 모임에서도 유서를 나누었지만, 제대로 글로 써 오지 않아 이번 달에는 다시 정확하게 글로 써서 나누기로 했기 때문이다.
말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글로 써서 읽는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글로 쓴다는 것은 말로 하던 생각을 다시 정리하는 일이기도 하고, 글로 써 놓은 것은 기록성과 보존성을 지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보다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을 다룰 때 단순히 말로 하지 않고, 글로 써 놓은 생각을 다루는 것도 이런 까닭이라 하겠다.
어제 모임에는 연말이라 몇 사람이 다른 일정과 겹쳐 참석하지 못했는데, 대신 새롭게 한 사람이 참여했다. 새로 참여한 이는 한산림연수원에서 마음살림 안내자로 활동하는 분으로, 자신을 ‘숨꽃’이라 소개했다. ‘숨꽃’이라는 이름이 가슴에 와 닿았다. 흔히 우리의 목숨은 들숨 날숨, 그 한 번의 숨결에 달려 있다고도 하지 않는가. 그 숨이 피워 낸 ‘숨꽃’이란, 곧 생명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싶었다.
20년 넘게 이어 온 이 모임은 누구든 와서 함께해도 되고, 또 언제든 떠나도 되는 모임이다. 공부 모임이라 하지만 사실은 수다 모임에 더 가깝다. 모여서 차를 마시면서 지난 한 달 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고, 읽어 온 책을 돌아가며 발제하고, 저마다 한두 가지씩 준비해 온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수다를 떠는 것이 전부인 모임이다.
어제는 송년 모임을 겸한 자리여서 저마다 서로 나눌 물품들을 준비해 왔고, 덕분에 나는 따뜻한 장갑과 서재를 은근히 밝혀 주는 등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
어제 유서를 읽고 나누는 중에 아내 정원님의 차례가 되어 유서를 읽었는데, 남편인 나에게 쓴 내용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이제 떠날 때가 되니 당신을 혼자 두기에 걸리는 것이 너무 많네요. 마음은 여리고 삶에는 서툴고 상처도 잘 받고 매사에 어리숙해서 어떻게 살아갈까요.”
몇 사람은 이 대목을 듣고 울컥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내의 표현 가운데 빠진 것이 더 있다는 생각이 나중에 들었다.
‘고집은 세고, 남의 말은 잘 듣지 않고, 언제나 제멋대로만 하는 당신을 혼자 두고 가기에는…’
아내의 유서를 듣고 난 뒤에 내가 말했다.
“그래서 내가 당신보다 먼저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주제로 한 해 동안 공부(?)해 오면서, 죽음이 무엇인지, 더구나 죽음 이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새롭게 알았다고 할 만한 것은 별로 없는 것 같다. 태어났으니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죽어가고 있다는 것, 잘 산다는 것이 곧 잘 죽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 등은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겨 왔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알고 있음’에 대한 느낌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 이제는 내 삶과 함께 있다는 것이 한결 생생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