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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17

위르겐 하버마스 ユルゲン・ハーバーマス

 

위르겐 하버마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르겐 하버마스
Jürgen Habermas
위르겐 하버마스 (2008년)
위르겐 하버마스 (2008년)
신상정보
출생1929년 6월 18일
바이마르 공화국 프로이센 자유주 뒤셀도르프
사망2026년 3월 14일(96세)
독일 바이에른주 슈타른베르크
시대현대철학
지역서양철학
학파대륙철학비판이론

위르겐 하버마스(독일어: Jürgen Habermas1929년 6월 18일 ~ 2026년 3월 14일)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심리학자이며 언론인이다. 비판이론과 실증주의북미 실용주의 분야를 연구한 사회학자로 유명하다. 소통 행위의 이론에서 공공 영역의 개념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회 이론의 기초와 인식론을 중심으로 연구하였으며, 진보된 자본주의 사회와 민주주의, 비판적 사회진화적 맥락, 현대 정치학(특히 독일의)에 영향을 미쳤다.

현대 사회 제도 안에서, 또한 이성적인 관심사를 쫓고 그것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인간의 수용 능력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잠재력과 이성, 정치적 해방에 대해 밝혀내는 것이 하버마스의 이론적 체계이다. 그는 파시즘은 좌우에 상관없이 나타날수 있다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었다. 뮌스터 대학교의 송두율의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다.

생애

생애 초반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났다. 그는 선천적으로 윗입술이 갈라져있는 구순구개열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1] 그래서 동리 소년들은 무시하고 놀림감으로 삼았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공부에 열중했다. 하버마스는 장애로 인해 나치 독일 치하에서 열성분자로 분류되어 히틀러 유겐트 정규반에 들어가지 못하고 응급처치반 하급요원이 되었는데, 그는 이 덕분에 자신이 유겐트 정규 복무를 받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2] 1949년 괴팅겐 대학교에서 철학을 수학한 이후 1954년까지 괴팅겐취리히 등지의 대학에서 철학심리학독문학경제학을 공부하였다.

교육, 비평 활동

이후 강사와 교수로 출강하면서 본 대학교 대학원 과정을 밟으면서 사회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현대 독일의 진보적인 교육자이자 언론인으로 알려졌으며, 1956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사회연구소에 아도르노의 조교로 들어가면서 비판 이론에 입문했다.

하지만 아도르노와의 사상적 입장 차이로 인해 하버마스는 마르부르크 대학교에 가서야 비로소 대학 교수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보다 앞선 1961년, 가다머는 그때까지 교수 자격 논문도 통과 못한 서른 두살의 그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로 초빙해 갔다.[3]

1961년에는 가다머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철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비판 이론과 파시즘 논란

하버마스는 1964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대학교로 돌아와 철학 및 사회학 교수가 되었다. 이로써 그는 비판이론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인정받았다.[4] 그의 교수로서의 활동은 1971년까지 계속되었다.[3]

1960년대 중반부터는 좌우 이념에 상관없이 전체주의적인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71년말, 하버마스는 돌연 교수직을 던져 버리고, 슈타른베르크(Starnberg)의 막스 플랑크 과학기술세계 생활조건 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대학을 떠난 데에는 1960년대 말부터 격렬해진 서독 내 학생운동 세력과의 갈등이 배경이 되었다. 그는 학생들의 폭력적인 시위를 마조히즘이라 비난하고, 학생운동을 좌파 파시즘이라고 맹렬하게 공격했다. 그는 이내 극렬한 학생운동권들의 적이 되었고, 부르주아 반동 지성인으로 매도당하는 현실에서 더 이상 대학에 머물며 입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부터 하버마스는 연구소에 파묻혀 10여 년간 오직 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했다.[3] 그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은 이후 오랜 세월의 사색과 탐구를 거쳐 탄생했다.[5] 하버마스에 대한 극우 진영의 공격과는 별도로 좌익, 학생운동권 진영의 비판 문제는 곧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좌익, 운동 진영의 편협성이 지적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밖에 한국 문제에도 관심을 보여 대한민국에서 김지하송두율 등 비판적 인사들의 처신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한국 정부의 폭력성과 표현의 자유사상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지적하고 질타했다.[1]

연구활동과 명예 교수

하버마스는 1982년에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대학교에 복직했다가 1996년에 정년퇴직하여 명예 교수가 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그는 영미 언어 분석 철학의 성과들을 폭넓게 수용해 독일 해석학의 의미 이론에 접맥, ‘화용론적 전회’를 감행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자기 철학을 수립해 나갔다. 그는 '의사소통 행위론'과 '논변 이론'을 체계화했고, 이것을 핵심으로 '논변 윤리학'과 '의사소통적 이성'의 합리성 개념 및 그것을 축으로 돌아가는 사회적 공론장의 구도를 제시했다. 또한 하버마스는 1960년대의 실증주의 논쟁을 필두로, 역사가 논쟁, 현대-탈현대 논쟁, 독일 통일 논쟁 등 2차 대전 이후 독일 현대사에서 정치와 학문의 방향을 가르는 거의 모든 논쟁에 참여했으며, 이런 활동들은 독일의 민주주의적 정치 문화를 진작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저서로는 <의사소통 행위 이론 1, 2>(1981), <도덕의식과 의사소통 행위>(1983), <현대의 철학적 논변>(1985), <사실성과 타당성>(1992) 등이 있다.

사상

하버마스는 많은 지적 전통을 바탕으로 철학과 사회 이론의 포괄적인 틀을 구축했다.

하버마스는 우주의 구조보다는 대인 언어적 의사소통의 구조에서 합리성을 위치시킴으로써 합리주의 전통과 구별되는 의사소통적 이성 또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개념과 이론의 발전으로 그의 주요 공헌을 고려한다. 이 사회 이론은 포괄적인 보편주의 도덕적 틀을 유지하면서 인간 해방의 목표를 발전시킨다. 이 틀은 모든 언어 행위에는 내재된 telos("목적"을 뜻하는 그리스어)가 있으며, 인간은 그러한 이해를 가져올 수 있는 의사소통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보편적 실용주의라는 주장에 달려 있다. 하버마스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J. L. 오스틴, 존 설의 연설-행동 철학, 조지 허버트 미드의 마음과 자아의 상호 작용 구성에 대한 사회학적 이론, 장 피아제와 로렌스 콜버그의 도덕적 발전 이론, 프랑크푸르트 동료와 칼-오토 아펠의 담론 윤리학에서 틀을 만들었다.

하버마스의 작품은 칸트와 계몽주의의 전통 안에서, 그리고 부분적으로 담론윤리를 통해 이성에 대한 인간의 잠재력의 실현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고 보다 인간적이고 공정하며 평등한 사회에 도달할 수 있는 잠재력에 대한 강조를 통해 민주사회주의의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하버마스는 계몽주의가 "미완성 프로젝트"라고 말했지만, 그는 그것이 폐기되지 않고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성과 계몽

하버마스는 단순히 가난과 빈곤만 사라진 상황을 인간의 진정한 해방으로 보지 않았다. 억압이 사라지고 자유로운 토론과 대화가 가능해야만 비로소 해방된 사회다. 그는 이런 해방된 사회는 이성을 통한 논쟁과 가르침, 곧 계몽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비판 이론가들이 회의하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해체하려 한 인간의 합리성을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현대 문명의 여러 문제들은 이성 자체의 결함에서라기보다, 아직 이성이 충분히 실현되지 않은 탓에 생긴 것으로 보았다(하버마스는 이를 미완의 근대라 표현한다).[4]

하버마스의 공론장

하버마스는 부르주아 공론장의 이념형을 전개하기 위해 18~19세기의 영국, 프랑스, 독일의 발전에 주목한다. 독일에서는 18세기 말까지 '작지만 비판적으로 토론하는 공론장'이 형성되었다. 도시민과 부르주아로 구성된 일반 독서 공중이 지속적 독서습관을 갖고 구축하여, 부르주아들의 배타적 공동체로서 실행되고 있었다. 그 후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공론장에 정치화 물결이 일어났다. 즉, '사회생활의 정치화', 신문의 증가와 검열에 대한 저항 투쟁과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은 19세기 중반까지 확장되어 가는 공공적 의사소통망의 기능 변화를 특징짓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국가와 사회의 경향적 분리에서 온 구조 변동을 두 가지 방식으로 개념화하였다. 근대의 자연법 이론이나 스코틀랜드 도덕철학의 사회이론에서만 해도, 시민사회는 전체적으로 사적 영역으로서 항상 공권력과 정부에 대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족적 사생활 영역과 직업 체제의 반대 방향으로의 구조화가 의식되었다. 이는 '시민사회:사적 영역=국가:공권력'의 관계에서 시민사회가 공권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면서 생활영역 자체가 다시금 사적 영역과 공권력의 영역으로 분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권력으로 인해 공론장은 의사소통적 영향력의 조종을 위해 싸우는 '권력화한 투기장'으로 성장하였다. 조직화된 집단의 구성원들은 다중심적 공론장에서 수동적 대중의 동의를 얻으려 경쟁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권력 조정과 이익조정을 둘러싸고 서로 경쟁하는 동시에 무엇보다도 국가 관료의 거대한 복합체에 대항해 겨룬다. 하버마스는 정치적 공론장에 내재하는 사회적 자기 조직화의 잠재력을 주목하고, 서구적 유형의 사회에서 복지국가 및 조직화된 자본주의에로의 복잡한 발전이 지닌 반작용들에 관심을 가졌다.

하버마스와 송두율

송두율 교수가 2003년 한국 귀국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에 있던중 '안중근 평화상'을 받게 되자 송두율 교수가 직접 감옥 밖으로 외출하여 상을 받는것으로 오인한 하버마스는 송두율 교수에게 직접 독일 대사관으로 피신하라고 일러주기도 하였다고 한다.[6]

저서

단행본

  • 대화 하버마스 대 라칭거 추기경 (위르겐 하버마스, 요제프 라칭거 공저, 윤종석 역, 출판사 새물결, 2009)
  • 분열된 서구 (장은주, 하주영 역, 도서출판 나남, 2009)
  • 진리와 정당화 (윤형식 역, 도서출판 나남, 2008)
  • 사실성과 타당성: 담론적 법이론과 민주적 법치국가 이론 (한상진, 박영도 역, 도서출판 나남, 2007)
  • 의사소통행위이론 2 (장춘익 역, 도서출판 나남, 2006)
  • 의사소통행위이론 1 (장춘익 역, 도서출판 나남, 2006)
  • 의사소통의 철학 (홍윤기 역, 도서출판 민음사, 2004)
  •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 (장은주 역, 도서출판 나남, 2003)
  • 공론장의 구조변동: 부르주아 사회의 한 범주에 관한 연구 (한승완 역, 도서출판 나남, 2001)
  • 사실성과 타당성 (한상진 외 역, 도서출판 나남, 2000)
  • 탈 형이상학적 사유 (이진우 역, 문예출판사, 2000)
  • 담론윤리의 해명 (이진우 역, 문예출판사, 1997)
  • 현대성의 새로운 지평 (한상진 역, 도서출판 나남, 1996)
  • 새로운 불투명성 (이진우 외 역, 문예출판사, 1995)
  • 소통행위이론 I (서규환 역, 의암출판문화사, 1995)
  • 커뮤니케이션 행위이론 I (이강수 역, 도서출판 나남, 1994)

논문

  •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이진우 역, 문예출판사, 1994)
  • 사회과학의 논리 (박성수 역, 문예출판사, 1988)
  • 후기자본주의 정당성 연구 (도서출판 청하, 1988)
  • 커뮤니케이션과 사회진화(심연수 역, 도서출판 청하, 1987)

수상 경력

  • 헤겔 상(1974)
  • 프로이트 상(1976)
  • 아도르노 상(1980)
  • 야스퍼스 상(1995)
  • 호이스 상(1999)
  • 독일서적상인 연합회 평화상(2001)

기타

송두율의 스승이라는 이유로 1986년까지 그의 서적은 대한민국 국내에 입수되지 못하였으며, 1986년 그의 서적을 번역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1987년 2월 이후 단행본으로 나왔으나 주목받지 못하였고, 1994년부터 그의 서적이 활발하게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다.

참고 문헌

  • 하버마스 『인식과 관심』 / 서도식 pdf
  • 하상복, 푸코&하버마스-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김영사, 2009)
  • 발터레제 쉐퍼, 하버마스 (선우현 역, 거름, 1998)
  • 문성훈, 하버마스가 들려주는 의사소통 이야기 (도서출판 자음과모음, 2008)
  • 위르겐 하버마스 정치문화 현실과 의사소통적 사회비판이론:하버마스 정치 시사 평론선집 (홍기수 역, 도서출판 문예마당, 1996)
  • 윤평중, 푸코와 하버마스를 넘어서 (교보문고, 1997)

같이 보기

각주

  1.  안광복,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 (웅진지식하우스, 2007) 412페이지
  2. 한상진 (2012년 7월 11일). [한상진 교수, 현대철학 거장 獨 위르겐 하버마스 교수와 자택 대담]<상>선천적 ‘언어장애’가 약자도 배려하는 의사소통이론에 영향. 동아일보. 2013년 6월 25일에 확인함.
  3.  안광복,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 (웅진지식하우스, 2007) 410페이지
  4.  안광복,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 (웅진지식하우스, 2007) 409페이지
  5. 안광복,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 (웅진지식하우스, 2007) 411페이지
  6. 독일 하이델베르크 송두율 교수 강연 전문. 2010년 6월 1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6월 13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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ユルゲン・ハーバーマス


ユルゲン・ハーバーマス(Jürgen Habermas、IPA: [ˈjʏʁgən ˈhaːbɐmaːs]、1929年6月18日 - 2026年3月14日)は、ドイツ哲学者社会哲学者・政治哲学者。ハバーマスハーバマスとも表記。

人物

フランクフルト学派第二世代に位置。公共性論や、コミュニケーション論の第一人者である。

ドイツの哲学者ハンス・ゲオルク・ガダマーとの論争、フランスの哲学者ジャック・デリダジャン=フランソワ・リオタールとの論争、ドイツの社会学者ニクラス・ルーマンとの論争、また1986年6月にフランクフルター・アルゲマイネ・ツァイトゥング紙に発表されたエルンスト・ノルテde:Ernst Nolte)による論文過ぎ去ろうとしない過去」に対して批判を加えたことによる歴史家論争de:Historikerstreit)、アメリカ合衆国の哲学者ジョン・ロールズとの論争でも有名である。

東西ドイツの再統一に際しては、目先の経済的利益や、民族主義に基づく性急な統合ではなく、「すべての人間にあてはまる規範を掲げる憲法を尊重せよ」とする「憲法パトリオティズム」を提唱した。

略歴

1929年6月18日、ドイツのデュッセルドルフに生まれる。父はエルンスト、母はグレーテ。父がグマースバッハ商工会議所会頭ナチス党員であったこともあり、少年期を同地のドイツ少年団ヒトラー・ユーゲントの一員として過ごし、敗戦を迎えた。

1945年、ドイツ敗戦後にギムナジウムでの学習に戻る。アメリカ占領下での民主主義教育は、彼の思想形成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ゲッティンゲンチューリッヒボンの大学に通い、新カント派現象学哲学的人間学歴史学経済学心理学ドイツ文学を専攻。1952年より書評、批評をフランクフルター・アルゲマイネ紙などに寄稿し始め、1953年、同紙に『ハイデガーと共にハイデガーに反対して考える』という論文を寄稿してハイデガーを批判。1954年フリードリヒ・シェリングに関する論文によりボン大学で博士号の授与を受けた後、1956年、フランクフルト・アム・マインに拠点を戻していた社会研究所に入りテオドール・アドルノの助手を務めた。しかし翌年に発表した文章が、社会研究所の中心人物であったマックス・ホルクハイマーによって、暴力革命を肯定する急進的すぎる内容だと捉えられ、ホルクハイマーは研究所からのハーバーマスの排除を図る。この頃、ハーバーマスは代表的著書である『公共性の構造転換』の着想を得ており、フランクフルト大学の教授職を求めたが、ホルクハイマーの反対を受け断念し、1959年に社会研究所を辞職した。『公共性の構造転換』を完成させたハーバーマスは、教授資格を取得し、1961年から1964年まではハイデルベルク大学において、1964年から1971年まではフランクフルト大学において社会学および哲学の教授に就く。1964年にホルクハイマーがフランクフルト大学を退くと、後任としてフランクフルト大学教授の職に就いた。つづいて1971年から1983年までミュンヘン郊外のシュタルンベルクにあるマックス・プランク研究所所長を務めた後、1983年より再びフランクフルト大学教授に就任し、1994年に退職。

2026年3月14日、シュタルンベルクドイツ語版で死去。96歳没[1]

思想

  • ハーバーマスは、フランクフルト学派第二世代に位置するが、第一世代の批判理論を承継しつつも、これを批判し、彼らによって生に従属する道具的理性として貶められた理性の復権をめざす。ハーバーマスは、『公共性(圏)の構造転換』(1962年)において、公共圏は、言論や出版の自由を得て自由に討論することにより政治的に参加することができた18世紀の市民社会においては、専制政治を行う国家の権力による「封建化」に対抗して家族や職場等の私生活の領域を解放する仲裁役として理想的に機能したが、19世紀後半に現れた大手企業やメディアが国家を支配する高度資本化による大量消費社会においては、公共圏が「再封建化」されるという構造転換があったと主張する。ハーバーマスは、『コミュニケーション的行為の理論』(1981年)では、20世紀において再封建化が進み衰退した公共圏の理想的な姿を取り戻すためには、人と人が相互の了解を追求・達成するコミュニケーション行為によって人を理解し、普遍的な社会批判の根拠を成し、より民主的な社会伝達や交流を可能にする、と主張した。マックス・ヴェーバーによれば、近代の合理化の進展につれ、それ自体が自己目的化し、本来人間のための合理化が逆に人間を鉄の檻のように包囲し、規定するという逆説的な状況が生まれた。彼の近代合理主義論を承継したマルクスやホルクハイマー、アドルノらフランクフルト学派第一世代は、社会の合理化を目的合理性のみととらえたところに過ちがあり、このようなシステム合理化のみならず、それと並行しておこった生活世界の合理化に着目すれば、近代的な理性を復権させることができるとする。
  • ハーバーマスは、現代社会では科学技術が個人の思想とは関係なく客観的に体系化されており、目的合理性において科学技術の体系は絶対的な根拠を持っているとした。ゆえにあらゆる政治行為の価値はまず目的合理性において科学的あるいは技術的に正当なものであるかどうかの判断抜きには成立せず、イデオロギーが何らかの制度を社会に確立するときに目的合理性に合致しているかどうかということは大きな影響を持つとされた。ときにはこのような目的合理性がそれ自体で支配的な観念となり、人間疎外をもたらすと指摘した。すなわちこのような目的合理性が支配的な社会では、文化的な人間性は否定され、人間行動は目的合理性に適合的なように物象化されていくと警告したのである。

論争

実証主義論争

ガダマー

ハーバーマスは、『社会科学の論理』(1967年)において、ガダマーの主著『真理と方法』における「理解されうる存在は言語である」とのテーゼを労働と支配という社会の実在連関を捉え切れていない言語の観念論であり、言語は制度化された暴力を正当化する道具にもなりえると批判すると、同年、ガダマーは、『修辞学・解釈学・イデオロギー批判』において、社会的現実的強制もまた言語的に分節化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反論し、論争に至った。その後、ハーバーマスは、『解釈学の普遍性要求』(1970年)において、「深層解釈学」、「普遍的語用論」という視点を基に、ガダマーの主張する伝統による言語によって見出される真理とは体系的に歪められたコミュニケーションかもしれず、保守的なイデオロギーとして機能すると再度批判し、ガダマーも再反論した[2]

ルーマン

1968年に開催されたドイツ社会学学会でニクラス・ルーマンが『全体社会の分析の形式としての現代システム論』との報告を発表すると、ハーバーマスは、これを批判する論文を発表した。

リオタール

デリダ

『近代の哲学的ディスクルス』(1985年)において、ジャック・デリダジョン・サールの論争に触れ、サールの言語行為論を支持した上で、デリダとデリダ派を批判した。彼によれば、ポストモダンの思想は、ヘーゲル右派の潮流をくむ「新保守主義」とニーチェの潮流とする「美的アナキズム」に大きく分かれ、後者はさらにバタイユ、ラカン、フーコーらの「懐疑的科学」の潮流と、ハイデッガー、デリダの「形而上学批判」の潮流に分かれるが、美的アナキズムは、近代の理性が自らの足元を攻撃し、掘り崩すという自己関係的な批判を楽しんでいるだけでなのである。理性を批判する反理性の言説も理性によりなされるのである。

歴史家論争

1986年、歴史家エルンスト・ノルテフランクフルター・アルゲマイネ・ツァイトゥング紙に「過ぎ去ろうとしない過去」を発表。その内容は、比較史の観点からアウシュビッツと他の大量虐殺との類似点を指摘し、アウシュビッツという過去も人類の歴史の中では決して特異なことではないというものであった。これに対し、ハーバーマスは、『ツァイト』紙に『一種の損害清算』との論文を寄稿し、これをきっかけに2年に及ぶ歴史家論争が開幕した。

ロールズ

ジョン・ロールズが『政治的リベラリズム』(1993年)を出版すると、ハーバーマスは、『ジャーナル・オブ・フィロソフィー』誌に「理性の公共的使用による宥和」と題する論文を寄稿。ロールズが原初状態という実体的概念を用いて近代的理性の普遍性を導き出すという方法論には難点があると批判し、むしろ理性の公共的使用という手続的な概念による代案を提示した。

受賞歴

著作

単著

共著

参考文献

脚注

  1. ^ Jürgen Habermas im Alter von 96 Jahren gestorben” (ドイツ語). FAZ.NET (2026年3月14日). 2026年3月14日閲覧。
  2. ^ Hermeneutik und Ideologiekritik, 1971.『解釈学とイデオロギー批判』

関連項目

外部リン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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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PA : [ˈjʏʁgən ˈhaːbɐmaːs], 1929년 6월 18일 - 2026년 3월 14일 )는 독일 의 철학자 · 사회 철학자· 정치 철학자 하버머스 , 하바머스 도 표기.

인물

프랑크푸르트 학파 2세대에 위치. 공공성 론이나 커뮤니케이션론 의 제일인자이다.

ドイツの哲学者ハンス・ゲオルク・ガダマーとの論争、フランスの哲学者ジャック・デリダジャン=フランソワ・リオタールとの論争、ドイツの社会学者ニクラス・ルーマンとの論争、また1986年6月にフランクフルター・アルゲマイネ・ツァイトゥング紙に発表されたエルンスト・ノルテde:Ernst Nolte)による論文過ぎ去ろうとしない過去」に対して批判を加えたことによる歴史家論争de:Historikerstreit)、アメリカ合衆国の哲学者ジョン・ロールズとの論争でも有名である。

東西ドイツの再統一に際しては、目先の経済的利益や、民族主義に基づく性急な統合ではなく、「すべての人間にあてはまる規範を掲げる憲法を尊重せよ」とする「憲法パトリオティズム」を提唱した。

略歴

1929年6月18日、ドイツのデュッセルドルフに生まれる。父はエルンスト、母はグレーテ。父がグマースバッハ商工会議所会頭ナチス党員であったこともあり、少年期を同地のドイツ少年団ヒトラー・ユーゲントの一員として過ごし、敗戦を迎えた。

1945年、ドイツ敗戦後にギムナジウムでの学習に戻る。アメリカ占領下での民主主義教育は、彼の思想形成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ゲッティンゲンチューリッヒボンの大学に通い、新カント派現象学哲学的人間学歴史学経済学心理学ドイツ文学を専攻。1952年より書評、批評をフランクフルター・アルゲマイネ紙などに寄稿し始め、1953年、同紙に『ハイデガーと共にハイデガーに反対して考える』という論文を寄稿してハイデガーを批判。1954年フリードリヒ・シェリングに関する論文によりボン大学で博士号の授与を受けた後、1956年、フランクフルト・アム・マインに拠点を戻していた社会研究所に入りテオドール・アドルノの助手を務めた。しかし翌年に発表した文章が、社会研究所の中心人物であったマックス・ホルクハイマーによって、暴力革命を肯定する急進的すぎる内容だと捉えられ、ホルクハイマーは研究所からのハーバーマスの排除を図る。この頃、ハーバーマスは代表的著書である『公共性の構造転換』の着想を得ており、フランクフルト大学の教授職を求めたが、ホルクハイマーの反対を受け断念し、1959年に社会研究所を辞職した。『公共性の構造転換』を完成させたハーバーマスは、教授資格を取得し、1961年から1964年まではハイデルベルク大学において、1964年から1971年まではフランクフルト大学において社会学および哲学の教授に就く。1964年にホルクハイマーがフランクフルト大学を退くと、後任としてフランクフルト大学教授の職に就いた。つづいて1971年から1983年までミュンヘン郊外のシュタルンベルクにあるマックス・プランク研究所所長を務めた後、1983年より再びフランクフルト大学教授に就任し、1994年に退職。

2026年3月14日、シュタルンベルクドイツ語版で死去。96歳没[1]

思想

  • ハーバーマスは、フランクフルト学派第二世代に位置するが、第一世代の批判理論を承継しつつも、これを批判し、彼らによって生に従属する道具的理性として貶められた理性の復権をめざす。ハーバーマスは、『公共性(圏)の構造転換』(1962年)において、公共圏は、言論や出版の自由を得て自由に討論することにより政治的に参加することができた18世紀の市民社会においては、専制政治を行う国家の権力による「封建化」に対抗して家族や職場等の私生活の領域を解放する仲裁役として理想的に機能したが、19世紀後半に現れた大手企業やメディアが国家を支配する高度資本化による大量消費社会においては、公共圏が「再封建化」されるという構造転換があったと主張する。ハーバーマスは、『コミュニケーション的行為の理論』(1981年)では、20世紀において再封建化が進み衰退した公共圏の理想的な姿を取り戻すためには、人と人が相互の了解を追求・達成するコミュニケーション行為によって人を理解し、普遍的な社会批判の根拠を成し、より民主的な社会伝達や交流を可能にする、と主張した。マックス・ヴェーバーによれば、近代の合理化の進展につれ、それ自体が自己目的化し、本来人間のための合理化が逆に人間を鉄の檻のように包囲し、規定するという逆説的な状況が生まれた。彼の近代合理主義論を承継したマルクスやホルクハイマー、アドルノらフランクフルト学派第一世代は、社会の合理化を目的合理性のみととらえたところに過ちがあり、このようなシステム合理化のみならず、それと並行しておこった生活世界の合理化に着目すれば、近代的な理性を復権させることができるとする。
  • ハーバーマスは、現代社会では科学技術が個人の思想とは関係なく客観的に体系化されており、目的合理性において科学技術の体系は絶対的な根拠を持っているとした。ゆえにあらゆる政治行為の価値はまず目的合理性において科学的あるいは技術的に正当なものであるかどうかの判断抜きには成立せず、イデオロギーが何らかの制度を社会に確立するときに目的合理性に合致しているかどうかということは大きな影響を持つとされた。ときにはこのような目的合理性がそれ自体で支配的な観念となり、人間疎外をもたらすと指摘した。すなわちこのような目的合理性が支配的な社会では、文化的な人間性は否定され、人間行動は目的合理性に適合的なように物象化されていくと警告したのである。

論争

実証主義論争

ガダマー

ハーバーマスは、『社会科学の論理』(1967年)において、ガダマーの主著『真理と方法』における「理解されうる存在は言語である」とのテーゼを労働と支配という社会の実在連関を捉え切れていない言語の観念論であり、言語は制度化された暴力を正当化する道具にもなりえると批判すると、同年、ガダマーは、『修辞学・解釈学・イデオロギー批判』において、社会的現実的強制もまた言語的に分節化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反論し、論争に至った。その後、ハーバーマスは、『解釈学の普遍性要求』(1970年)において、「深層解釈学」、「普遍的語用論」という視点を基に、ガダマーの主張する伝統による言語によって見出される真理とは体系的に歪められたコミュニケーションかもしれず、保守的なイデオロギーとして機能すると再度批判し、ガダマーも再反論した[2]

ルーマン

1968年に開催されたドイツ社会学学会でニクラス・ルーマンが『全体社会の分析の形式としての現代システム論』との報告を発表すると、ハーバーマスは、これを批判する論文を発表した。

リオタール

デリダ

『近代の哲学的ディスクルス』(1985年)において、ジャック・デリダジョン・サールの論争に触れ、サールの言語行為論を支持した上で、デリダとデリダ派を批判した。彼によれば、ポストモダンの思想は、ヘーゲル右派の潮流をくむ「新保守主義」とニーチェの潮流とする「美的アナキズム」に大きく分かれ、後者はさらにバタイユ、ラカン、フーコーらの「懐疑的科学」の潮流と、ハイデッガー、デリダの「形而上学批判」の潮流に分かれるが、美的アナキズムは、近代の理性が自らの足元を攻撃し、掘り崩すという自己関係的な批判を楽しんでいるだけでなのである。理性を批判する反理性の言説も理性によりなされるのである。

歴史家論争

1986年、歴史家エルンスト・ノルテフランクフルター・アルゲマイネ・ツァイトゥング紙に「過ぎ去ろうとしない過去」を発表。その内容は、比較史の観点からアウシュビッツと他の大量虐殺との類似点を指摘し、アウシュビッツという過去も人類の歴史の中では決して特異なことではないというものであった。これに対し、ハーバーマスは、『ツァイト』紙に『一種の損害清算』との論文を寄稿し、これをきっかけに2年に及ぶ歴史家論争が開幕した。

ロールズ

ジョン・ロールズが『政治的リベラリズム』(1993年)を出版すると、ハーバーマスは、『ジャーナル・オブ・フィロソフィー』誌に「理性の公共的使用による宥和」と題する論文を寄稿。ロールズが原初状態という実体的概念を用いて近代的理性の普遍性を導き出すという方法論には難点があると批判し、むしろ理性の公共的使用という手続的な概念による代案を提示した。

受賞歴

著作

単著

공저

참고문헌

각주

  1. ↑ “ Jürgen Habermas im Alter von 96 Jahren gestorben ” (독일어). FAZ.NET (2026년 3월 14일). 2026년 3월 14일에 확인함.
  2.  Hermeneutik und Ideologiekritik, 1971. '해석학과 이데올로기 비판'

관련 항목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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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Young Lee

11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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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 사거에 부쳐>

근 30년도 더 전에 나는 <그람시와 하버마스>란 주제의 박사논문을 썼다. 1994년이다. 그람시의 ‘시민사회’와 하버마스의 ‘생활세계’개념을 비교하는 논문이었다. 그러니 내 논문의 절반이 하버마스인 셈이다. 

내가 그 때 내린 결론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어떤 하나의 ‘장엄한 실패’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기반한 그의 ‘생활세계 (Lebenswelt)’ 개념은 비록 당시 독일과 또 유럽에서 유행하던 ‘시민사회’개념을 포섭하고자 시도했지만 이 또한 현실의 거대한 벽에 부딪쳐 결국 좌절의 운명을 맞이 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래 사진이 - 제공 백찬홍 -  나왔던 시점, 하버마스는 난데 없이 한국을 초청방문 여기저기 거하게 바람을 일으켰고, 나역시 그와의 집단 토론 자리에 간 적이 있었다. 아직도 당시의 녹음테이프를 갖고 있다. 지금 기억으로 황당했던 일은 하버마스에게 우리 통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 지 하는 질문이었다. 좀 황당해 하던 그의 표정이 남는다.  나역시 어이없었다.

그의 교수자격논문(하빌리타치온)이 저 탁월하고 유명한 <공공영역의 구조변화>다. 이 때 그의 지도교수가 볼프강 아벤트로트(Wolfgang Abendroth)다. 루카치가 활동하던 시절, 독일사민당좌파의 일원으로 바이마르공화국의 지적 흐름을 온 몸으로 체감하면서 반나치운동에 연대하다 게쉬타포에 체포되어 이른바 정치범부대 999연대의 일원으로 그리스에 강제파병된다. 그리스에서 그는 현지 빨치산과 협력해 반나치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연합군에 체포되어 이집트수용소에서 나치패망을 맞았다. 동독지역에서 활동하다, 당시 공산당과의 이견으로 서독으로 월서, 도피해 일군 학파가 마르부르크(Marburg)학파다. 

마르부르크학파는 독일 68운동의 한 축이었다.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가 나의 선생 프랑크 데페(Frank Deppe)였다. 하버마스는 이들 보다 선배그룹이었다. 68운동 당시 그는 이미 제도권의 교수였다. 하지만 아벤트로트교수를 매개로 그의 절반은 아니지만, 적어도 1/3정도는 역시 마르부르크학파인 셈이다. 

하지만 내가 공부할 시절, 이미 하버마스는 그가 ‘빨치산교수‘라고 명명했던 실천파 교수 아벤트로트의 다른 제자와는 거의 왕래가 없었다. 가는 노선이 프랑크푸르트학파와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나의 학위논문에서 하버마스를 신랄하게 비판했을 때, 나의 선생은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반겨주었다. (ㅎㅎ)

귀국이후 나는 하버마스이론을 다시 찾지도, 가르치지도 않았다. 대신 나머지 절반인 그람시의 사상은 지금도 나에겐 향도다. 지극히 큰 영향을 받았다. 

그 하버마스가 세상을 떠났다. 굳이 찾자면 나의 Doktorvater(박사논문지도교수를 독일에선 ’아버지‘라 부른다)의 Vater가 그의 교수자격논문 지도교수라는 인연외엔 없지만, 그럼에도 사회비판의 파토스는 여전히 공분모다.  호르크하이머가 그의 교수자격논문 지도를 그가 ’너무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거절한 뒤, 그를 거둬들인 이가 아벤트로트였다. 아벤트로트의 정신은 여전히 나에게도 방향타다. 

독일철학의 황금시대는 끝났다. 독일학계가 세계화와 더불어 급속히 ’미국화‘되면서 말이다. 이제 그 시대조차 제국의 황혼과 함께 저물고 있다.  

하버마스는 얼마 전 내가 낸 책의 주인공 칼 슈미트의 가장 신랄한 비판자이면서 동시에 ’백도어‘로 적쟎은 ’역의 소통’이 있었다고 나는 본다. 슈미트 역시 96세의 수를 누렸다. 딱 하머마스만큼 말이다.  

독일비판이론의 한 세기는  하버마스의 자연력 96년으로 이제  마무리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즌2는 없을 것 같다. 

부디 그의 영면을 빌면서, 독일비판철학의 있을 것 같지 않은 새 장에 실날같은 희망을 걸어 본다.

태영최

논문에서 두 사람을 비교했다는 것은 한 사람도 제대로 연구안했다는 것?

ㅋㅋㅋ

사거를 잠시 생각해 봅니다.

팔란티어 ceo 알렉스 카퍼가 하버마스 아래에서 지도를 받았다더군요.

9h

Reply

Edited

김승조

아 돌아가셨군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해영 선생님의 애도와 추모의 글을 접하면서 한편으론 송두율 선생님의 크나큰 슬픔도 느껴지네요. 경향에 추도사를 올리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