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y Page

2025/09/29

진리를 구하는 자이자 여성으로서의 카미야 미에코의 삶과 고난

 진리를 구하는 자이자 여성으로서의 카미야 미에코의 삶과 고난

카미야 미에코(神谷美恵子, 1914-1979)는 한센병(나병)에 관한 정신의학 연구와 그녀의 수많은 저서들, 특히 "<살아가는 보람에 대하여 (Ikigai ni Tsuite)>"로 잘 알려진 저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였다. 그녀는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그리고 고전 그리스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했다.

그녀의 삶은 놀라운 업적들로 가득 차 있지만, 결코 순탄하거나 평탄하지 않았다. 그녀가 남긴 <일기와 서신>을 통해, 그녀의 삶이 기쁨과 감사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고통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에게는 자신을 "<악마>"라고 이름 붙인 <독특한 사명감>과 <강한 욕망(충동)>이 있었고 , 가정을 가진 여성으로서 자신의 경력에 집중하는 문제에 대해 깊은 갈등을 겪었다. 이 글은 진리를 추구하는 자이자 여성으로서 그녀가 겪었던 고난과, 그녀를 지탱해 준 사람들에 초점을 맞춘다.


미에코의 삶의 여정

1. 출생부터 18세까지

미에코는 1914년 1월 12일 오카야마 시에서 아버지 <마에다 타몬(前田多門)>과 어머니 후사코(房子)의 <둘째이자 맏딸>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가 한 명 있었고, 아래로 두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었다. 미에코 자신은 자신의 어린 시절이 <어두운 인상>이었고, 잘 우는 까다로운 아이였다고 말했다.

교육: 1923년(9세)에 아버지가 제네바 <국제노동기구 일본 정부 대표>로 임명되면서 가족 전체가 스위스로 이주했다. 미에코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프랑스어로 교육을 받은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으며 , 프랑스어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느꼈고, 이는 그녀의 후기 학습 태도와 탐구 정신의 기초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1932년(18세)에 쓰다 영학숙 본과에 입학했고 , 졸업 직전 학과장으로부터 <앞으로 사회에 어떻게 공헌할 것인지>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이 어떤 길을 가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2. 한센병과의 충격적인 만남

19세 되던 해(1933년), 미에코는 숙부의 요청으로 <타마젠쇼엔 한센병 요양소>를 방문해 오르간을 연주했다. 한센병 환자들의 모습은 그녀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고 , "<내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환자들을 보며 "<나는 이런 환자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라고 외치며 의사가 되기를 강하게 열망했지만, 부모님의 <강한 반대>로 포기해야 했다.

3. 결핵, 요양, 그리고 의학의 길

21세(1935년)에 <폐결핵>에 걸려 요양 생활을 시작한 것은 그녀의 삶의 방향을 다시 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요양 중 <고전 그리스어>로 된 신약성경, 호머, 플라톤,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으며 학문에 몰두했다. 특히 『명상록』은 결핵으로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느꼈던 미에코에게 <삶의 의미의 기초를 발견>하도록 도왔다.

이 요양 기간 동안 그녀는 <재구성 경험과 빛의 섬광 경험>을 겪었는데 , 일기에는 "<번개 같은 눈부신 빛의 섬광>이 시야를 가로질렀고, 동시에 <가슴 밑바닥에서 강렬한 기쁨>이 솟아나 승리의 외침을 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경험은 그녀의 강렬한 <사명감>의 토대가 된 것으로 보인다.

1939년(25세), 미에코는 뉴욕 만국 박람회에서 <공중 보건 및 영국 사회 복지 부문>에 크게 매료되었다. 이 모습을 본 아버지는 "미에코, 너 의사가 될 것 같구나. 의학에 사로잡혔어. 운명일지도 모르지. 좋다, 나도 포기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지원할 테니 해라"라고 말하며 마침내 의사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1938년에는 어머니의 권유로 미국 <퀘이커 기숙사(Pendle Hill)>에서 짧은 기간을 보내기도 했다.

4. 정신과 의사로서의 삶 (30세 이후)

1944년(30세)에 미에코는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 정신과에 들어가 <정신과 의사> 수련을 시작했다. 그녀는 "정신과 일만큼 나에게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맞는> 직업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부주의하고 겉치레를 좋아하는 성격>을 반성하며 <의사 자격>이 있는지 고통스럽게 고민했다.

그녀는 <자신의 병적인 측면>을 스스로 인지하며 자신을 <분열 기질 + 순환 기질>을 가진 존재로 파악했고 , <혼돈의 위협> 속에서 살고 있다고 느꼈다. 종전 직후 아버지가 <문부대신>이 되자, 미에코는 아버지를 도왔다. 그러나 그녀는 <진정한 본성>을 드러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과 씨름했다. 그녀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미학적(aesthetisch), 종교적(religiös), 과학적(wissenschaftlich), 사회적(sozial) 측면>을 통합해야 하는 고통을 느꼈고 , 이 <충동적인 욕망>을 "<일곱 마리의 악마>"라고 불렀다.

결혼 후의 고난: 결혼 후(1946년) 두 아들을 낳은 미에코는 아내와 엄마 역할에 충실하는 동시에, 생계를 돕기 위해 <외국어 강사 및 번역 아르바이트>에 매달렸다. 그녀는 "매일 영어 첨삭을 하다 보면 좌절해서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다. 인생은 원치 않는 일을 하는 것일까?"라고 일기에 적으며 , 정신과 의사로서 해야 할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이루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자신을 독려했다.

<한센병 환자를 위한 연구>를 위해 아이들과 남편을 두고 <아이세이엔 요양소>에 갈 때마다, 그녀는 <비정한 엄마와 나쁜 아내>라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우울증을 겪었고 ,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할 때면 말도 못 할 정도로 괴로워했다.


4. 그녀를 지탱한 것들

한센병 환자를 향한 끝없는 사명

1957년(43세)부터 <아이세이엔 요양소>에서 정신과 연구와 진료를 시작했다. 그녀는 <아이세이엔으로 가는 것은 미에코가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그녀는 요양소에서의 진료가 <사람들의 감정 쓰레기장>이 된 것 같은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 이 고통을 통해 "정체에 저항하는 삶에는 기쁨이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녀는 환자의 <정신적 자유>를 존중하는 자세로 15년간 그들을 대했다.

영적인 지지

말년의 미에코는 "수많은 환자 중 단 한 사람도 고칠 힘이 내게 없다.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기고> 하루하루를 살 수밖에 없다"고 고백했고 ,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기록했다. 그녀는 플라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니체, 그리고 평생의 친구 마사 우라구치 등 <자신의 지지자들이 있었다>고 보았다.

남편의 헌신적인 이해

미에코를 지탱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남편 카미야 노부로(神谷宣郎)의 존재와 깊은 이해>였다. 노부로는 미에코가 연구에 몰두하여 현실 감각을 잃었을 때도 그녀를 "<신과 같다>"고 여겼고 , 아이들을 뒤로하고 떠나는 아내의 <비극적인 모순>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진리 추구자의 남편>으로서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녀는 평생 동안 고난과 내적 갈등을 겪었지만, 바로 그 고통 덕분에 그녀의 업적들이 더욱 빛난다고 이 글은 이야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