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마음에 빈 방 하나를/
잠시 떠나있다가 돌아오면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집 안팎으로 풀이 우거지고 여러 물건이 널려 있다는 것이다.
무성하게 자란 풀이야 예초기로 잠시 베어내면 대강 정리할 수 있지만, 집 안 이곳저곳에 쌓인 것들을 정리하기에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언젠가, 어디엔가 쓸모 있을 것이라고 버리지 못하고 쌓아둔 것들이 이제는 온 집 안에 가득하게 된 것이다. 집 안만이 아니라 창고에도 지금은 거의 쓸모없게 된 것들이 그렇게 쌓여 있다.
이십 년 전 이곳에 새로 거처를 마련하면서부터 보지 않고 있는 텔레비전이며, 고장 난 컴퓨터 등도 그대로 있는데, 이제는 고물상에서도 가져가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온 사방에 쌓여 있는 책들도 인연이 있는 학교 도서관에 보내기로 했는데, 아직 가져가지 않고 있다.
결국 빈손, 빈몸으로 떠날 수밖에 없을 텐데, 떠나기 전에 이것들을 대충이라도 정리할 수 있을까.
그래야 남은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게 하고, 떠난 자리도 그만큼만 상큼해질 수 있을 것이라 싶은데, 여태 치우질 못하고 미루기만 하다가 이제는 내 힘으로는 치울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오래전부터 빈방 하나를 갖고 싶었다. 방 안에 아무것도 없는 완전히 텅 빈 방 하나를.
굳이 명상을 하지 않더라도 틈틈이 그 방에 들어가 그냥 가만히 앉아 있고 싶었다. 그러면 세상 속에 찌든 내 마음의 무게가 조금쯤 가벼워지리라 싶었다.
그래서 스무 해 전, 이곳 산자락 작은 개울 옆에 새롭게 거처를 마련했을 때, 작은 방 한 칸을 따로 마련했다. 인연이 있던 이가 개울 옆에 팔각의 형태로 황토방 하나를 별채로 만들어준 것이다. 덕분에 마침내 내가 바라던 그런 빈방 하나를 갖게 된 것이었다.
처음엔 그 빈방에 가서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좋았다. 빈방이 그 자체로 내게는 충만했다. 그러다가 앉아 있기 편하게 하려고 방석 하나를 들이고, 그다음에 그곳에서 차를 마시기 위해 작은 찻상과 다구를 들이게 되었다. 그렇게 차츰 필요한 것들이 하나둘 쌓여 가더니 어느새 그곳이 또 다른 응접실이 되고, 서재가 되고 공부방이라는 이름의 모임 자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텅 비어 있던 그 방이 온갖 것들로 가득 차 있어 들어가 앉아 있기에도 편치 않은 곳이 되어버렸다.
텅 빈 충만이라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닿는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당신 안에 누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그 질문에 계속 답해 가다가 더 이상 동일시할 수 없는 그 막다른 순간에, 안간힘으로 붙잡고 매달렸던 것들을 놓고 완전히 포기해버린 그 순간에 환하게 열리던, 청청하고 충만하고 여여한 그 황홀(?)에 대한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그림자 없는 빛으로 충만했던 그것을 사랑이라 할 수 있으리라고 나중에 생각했었다. 사랑이란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완전하고 충만한 어떤 에너지 상태라는 느낌이었다.
내가 '무한한 빛과 사랑'이라고 불렀던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온전히 충만했다.
무한한 빛과 사랑. 그것이 어쩌면 우주와 존재의 본바탕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어떤 집중된 에너지 상태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켄 윌버가 "의식의 스펙트럼"에서 말한 '우주의식' 또는 '근원의식'의 차원인지, 또는 불가에서 말하는 초견성 상태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동일시를 넘어서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찾을 수 없었을 때,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그 절망의 포기 끝에 마치 섬광처럼 열렸던 그 무한한 빛과 사랑은 벅찬 환희와 감사와 같은 것이었다.
절로 눈물이 나고 뒤이어 한바탕 웃음이 쏟아졌다. 그렇게 눈물과 웃음이 함께 터져 나온 것은 아마도 그토록 갈망하던 '나'라고 하는, 이 생각을 넘어, 드러나 보이는 이 존재를 넘어, 마침내 여여한 내 존재의 본질, 그 실상(?)에 가닿았다고 하는 환희와 감사와 함께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이 이렇게 가까이,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다는 것에 대한 허탈감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 또한 내가 그 순간에 왜 그렇게 울고 웃었던가를 나중에야 떠올려 본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경험을 불가에서 말하는 초견성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을 했던 것은 내 의식이 한 생각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문득 반야심경의 의미가 환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알았다는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던 까닭이다.
반야심경에서의 공을 흔히 '텅 빈 충만'이라고도 이야기한다면,
반야심경의 그 공성(空性)이 내 체험으로 그냥 저절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라 싶다.
그런 체험 후에 그 눈부시고 청정하고 여여하고 충만한 그 느낌을 다시 맛보고 싶어 한동안 헤맨 적이 있었다.
잠시 번쩍하고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 아니라 내 온 존재가 그런 느낌 속에 머무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견성 뒤의 수행이라는 보림(保任)의 의미를 담아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으로 가서 잠시 머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이 또한 부질없음을 안다. 내가 체험했던,
무한한 빛과 사랑이라고 느꼈던 그것이 만약 존재의 실상이라고 한다면 지금 여기 드러나 있는 나와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이고, 어떤 에너지 상태를 체험한 것이라 해도 그 또한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나에게는 드러나 있는 존재의 내면에 그 존재와 분리된 숨겨진 어떤 존재가 따로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어떤 것을 현상과 본질로 나누어서 이야기할 수는 있다고 해도, 그때의 본질조차 현상과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더욱이 우리는 현상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른바 본질이라는 것을 체험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이 지금의 내 인식이다.
이런 생각 또한 나의 한 생각임을 안다. 내가 체험했던 것도 확신하기 어려운데, 읽고 들은 것이 그렇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요즘은 이런 내 생각과 인식이 한결 내 마음을 편하게 한다. 한동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으로 무겁던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다.
그래서 기적이나 신비 또는 어떤 영적 황홀경 같은 것에 대한 관심 또한 사라졌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신비이고 일상의 삶 자체가 기적이라는 말이 갈수록 공감되기 때문이다.
빈방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다. 새삼 빈방이 다시 그리워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무엇을 추구하고 더 보탬으로써 자신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여태껏 보태고 쌓아왔던 것들을 비우고 놓아버림으로써 삶의 무게를 보다 가볍게 하는 것이 남은 날의 중요한 일이라 싶기 때문이다. 그래야 발걸음이 가볍지 않겠는가.
'위학일익(爲學日益)이요, 위도일손(爲道日損)'이란 "도덕경"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그렇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도 이런 비움일 것이다. 그것은 새삼 무슨 도(道)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걸음을 보다 가볍게 하고 싶은 까닭이다.
하기사 도(道)라고 해서 삶을 떠나 따로 있겠는가. 일용행사가 모두 도가 아님이 없다는 해월 선사의 말처럼 일상에 지극한 마음 씀이 결국 도의 실행이 아니겠는가.
지금 당장 온 방 안에 쌓인 것들을 치우고 빈방으로 만들 만한 기운이 없으니 우선은 내 마음 한 켠을 비워 그곳에 빈방 하나를 마련해야겠다. 그래서 마음이 지치거나 무거워질 때 그 빈방에 들어 잠시 쉴 수 있으면 좋겠다.
(25. 09.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