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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5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칼 라너의 ‘초월론적 경험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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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is with 송화섭.

제자인 송화섭 목사(박사, 안산 꿈의교회 부목)가 22쪽의 논문,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칼 라너의 ‘초월론적 경험신학’” 을 보내왔다. 나는 급한 일만 처리하고 우선 이 논문을 읽었다. 

이 논문은 정말 큰 주제를 다룬다. 20세기 가톨릭 신학의 거장 칼 라너의 핵심 사상을 중심에서 정공법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칼 라너(Karl Rahner)는 개신교의 칼 바르트(Karl Barth), 정교회에서는 루마니아 출신 두미트루 스타닐로아(Dumitru Stăniloae), 아시아에서는 인도 신학자 라이몬 파니카(Raimon Panikkar), 그리고 한국의 다석 유영모(多夕 柳永模)와 함께 내가 20세기 신학계/철학계의 사유의 거장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다.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예수회의 창시자로 영성수련의 중요한 교과서인 『영신수련』을 남긴 분이다. 라너는 예수회 소속 신부요 신학자로서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기”라는 이냐시오 영성을 철학적으로 철저하게 기초한 사상가이다. 그래서 라너의 신학을 “초월론적 경험신학”이라고 말한다. 
나는 라너의 신학의 업적을 19세기 슐라이어마허가 이룩한 인간학적, 성령론적 전환의 신학을 가톨릭에서 성취한 인물로 비교하여 이해하고 있다. 물론 라너의 신학 여정에는 유구한 가톨릭 전통과 철학적으로 칸트와 헤겔, 그리고 하이데거가 있다.
바르트가 계시 중심적인 ‘하나님 말씀의 신학’을 강조했다면 라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혹은 들을 수 있는 능력이 내재된 “말씀의 청자”(Hörer des Wortes)인 인간과 세계내재적 영의 활동으로서의 ‘세계 안에서 활동하는 영’(Geist in der Welt)이라는 작품을 그의 사상의 기조로 삼았다. 따라서 “인간의 가능성(possibility)인 직접적 하나님 경험이 인간 안에 현존하고 잠재한다고 말할 수 잇는 것이다.
이냐시오 영성의 구조와 특징이 세상의 무관심(indifferent, 무심 혹은 초연 내지는 초탈이라 옮기면 어떨까)과 만물 안에서 하나님 찾기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궁극적인 의미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우리 인간을 부르심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거 참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하나님이 왜 우주와 세상을 창조하고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이 되어 고난받으시고 다시 새롭게 창조하는 활동을 하시겠는가?
”라너의 초월론적 경험신학“이라고 어렵게 들릴 수 있는 단어를 엮어놓아지만, 이 말은 인간의 보편적 조건으로서 하나님 경험을 말하고자 함에 있다. 인간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하나님 경험을 하고 있고, 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그 능력을 라너는 ‘초자연적 실존’(supernatural existential)과 그와 연관된 ‘순종 능력’(obediential potenc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의 선취(Vorgirff auf Gott), 즉 비주제화된 하나님의 앎“이란 개념화 이전, 의식 이전, 분별지 이전, 이성적 판단 이전, 감성과 감각과 몸과 살의 떨림 속에서 우주의 물질과 파동의 움직임과 울림과 그것들의 소통 속에도 이미 하나님이 현존하시고 그것을 함께 느끼고 경험한다는 말이다.
이냐시오와 라너는 교회의 중심교리와 상징 등을 스스로 체험하게 함으로써 깊은 신비체험에 이르게 한다. 사랑의 요소가 중심을 이루지만 영적 결혼을 말하기보다는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영적 인간의 삶, 곧 섬김의 활동을 말하는 신비주의를 발전시켰다.
비주제적인 초월론적 하나님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제화되고 교회를 통해 공동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자기 양여가 공동체적으로 실재화 되는 장이며, 보편 은총을 성사, 말씀, 공동체 규범성으로 주제화하는 영성의 결정체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화두는 제자도에 관한 것이다. 제자의 길이란 일상에서 이러한 초월론적 경험을 실제 경험적으로 하면서 사는 자이다. 일상 속 성령 경험인 것이다. 송화섭 목사는 라너 신학의 요체를 이렇게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자신 안에 이미 절대이신 하나님께 초월하도록 정향 지워 있기 때문에 자기 경험은 하나님 경험의 근본적인 조건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 경험은 인간 경험 안에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 경험은 조직화 된 그리스도교의 범주를 넘어 모든 일상생활에서 발생한다.“
서양 신학은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하나님 말씀(logos)과 그 말씀을 듣는 청각기관을 중시한다. 물론 최근 서방신학에서도 청각만이 아니라 시각, 후각, 미각, 촉각 및 슈타이너가 말하는 12감각에 이르기까지 말씀의 물질화를 향해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청각 중심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동학의 수운 최제우의 경우는 직관적으로 하나님을 몸 안에 모신다. 侍天主! 신학자들은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는데 전 생애를 다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끝내 잘 말할 수 없는 하나님(天)에 대해 수운은 애초부터 침묵한다. 물론 무엇이 좋은지 잘 모르겠으나 양쪽이 중도의 균형을 이루었으면 좋겠다. 
수운도 철학적인 배경과 역사를 깔고 있지만 서양의 학자들처럼 이전 사상가들을 복잡하고 치밀하게 재해석하지 않는다. 안 하거나 못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시간과 여건이 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상의 핵심을 돌파하여 직관적으로 주문처럼 쏟아낸다. 사실 21자의 주문 안에서.